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귄터 폰 클루게 (문단 편집) === [[폴란드 침공|폴란드 전역]], [[프랑스 침공|프랑스 전역]] === [[파일:external/media-2.web.britannica.com/47910-004-1687D55F.jpg]] ▲ 1939년 기사 철십자 훈장 기념 촬영 사진. 수훈과 동시에 원수로 진급한다 1939년 9월 [[폴란드 침공|폴란드 전역]]이 터지자 클루게는 4군을 이끌고 눈부신 전략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. 그의 4군은 순식간에 [[단치히 자유시]](지금은 폴란드의 [[그단스크]])를 점령하고[* 어차피 당시 그단스크는 거의 대부분이 [[독일인]]인 데다가 해당 지역에 폴란드 수비대의 숫자는 [[우체국]]에 있던 '''56명'''에 불과했다. 이 중 [[포로]]로 잡힌 이들은 나중에 처형당한다. 현장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수비대원은 4명에 불과했으며, 전후까지 모두 운 좋게 살아남는다.] 비스와 강 연안에 도달하였다. 그는 그의 부대를 따라오는 [[슈츠슈타펠]]이 벌이는 학살극을 목격하고 충격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. 폴란드의 전공으로 그는 [[상급대장]]으로 진급했다. 이때부터 [[하인츠 구데리안]]과의 갈등이 시작되는데,[* 구데리안은 당시 4군 기갑 군단장으로 클루게의 부하였다.] 당시 구데리안은 빠른 돌격 전술로 폴란드를 빠르게 침공하는데 공을 세웠다. 당시 클루게는 천천히 확실하게 적군을 격파시키는 전술을 사용했기에 이는 매우 위험천만하게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. 자연스레 구데리안이 돌격전술로 지나쳐온 땜빵을 클루게가 메꾸게 된 것. 성공적으로 폴란드를 점령한 후 클루게는 히틀러가 [[서부전선]]에서 [[영국군]], [[프랑스군]]과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하였으나 히틀러의 결심히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[[프랑스 침공]]은 1940년 5월에 개시되어 결과적으로 전사 상 가장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. 클루게는 프랑스 침공에서도 과감하게 휘하의 4군을 전진시켰고, 스스로를 [[미셸 네|네 원수]]라고 지칭할 만큼 자비 없이 밀어붙였는데 부하들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상당히 엄격했다고 한다. 쾌속 진격할 때에도 진두 지휘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고.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클루게는 [[에르빈 롬멜]]과 비슷하게 자신감과 야망이 넘치는 인물이긴 하지만 허영심은 없었는데 탁월한 웅변으로 휘하의 부하들을 장악하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. 그러나 클루게는 여기에서도 구데리안과 갈등을 겪게 된다. 구데리안은 여기에서도 전차를 앞세워 돌격전술을 사용했다. 클루게는 여기에서도 또다시 구데리안이 남겨놓은 땜빵을 메우면서 진격하게 된 것. 하지만 워낙 구데리안이 큰 공을 세운 탓에 뭐라 할 말은 없었다. 이후 구데리안은 클루게와 동급인 상급대장으로 진급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